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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 스페인 안달루시아지방 세비야 / 황금의 탑 / 알카사르 궁전

플랙스라이프 발행일 : 2023-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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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사의 패키지여행으로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을 다녀왔는데요. 오늘은 그중에서 스페인에서 4번째로 큰 도시 세비야와 과달키비 강 근처에 있는 황금의 탑 그리고 알카사르 궁전에 대하여 소개하여 드리겠습니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대도시 세비야

1. 세비야 개요

에스파냐 남부 자치지방(comunidad autónoma)인 안달루시아의 주도(州都)이자 세비야 도의 도청소재지인 세비야는과달키리비르강 하류에 자리한 항구도시인데요. 2020년 기준, 약 7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며 세빌리아라고도 불리고 스페인에서 마드리드 - 바르셀로나 - 발렌시아 다음으로 큰 도시인데 서울과 동일 위도(북위 37도)에 있습니다.

세비야 지도 사진세비야 전경 사진
세비야 지도와 전경

도시의 이름은 로마제국의 지배 당시 불렸던 지명인 ‘히스팔리스(Hispalis)’에서 유래하며 로마제국의 붕괴 이후 이슬람의 지배 당시에는 이스빌리야(Išbīliya)로 불렸고, 13세기 중반 카스티야-레온왕국에 정복되면서 오늘날의 세비야로 정립되었습니다.

세비야의 구시가지 사진세비야의 구시가지 사진
세비야의 구시가지

세비야는 과거 스페인에서 크게 번성했던 핵심 도시였는데 나중에 카스티야 왕국에게 점령되었고 스페인이 형성된 이후에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번창했던 세비야는 712년 무어인들에 의해 정복되어 1248년 레콩키스타 운동을 벌인 에스파냐에 의해 탈환되기까지 이슬람 왕조의 수도였으며 16세기에는 신대륙과의 무역 독점권을 가져 대서양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전성기를 누리다가 아메리카 대륙이 자체적으로 산업을 발전시키자 쇠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18~19세기 산업 재건과 공업화를 통해 세비야의 경제는 다시 회복되었는데 세비야는 500여 년 동안 이슬람 왕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이슬람 문화와 유적이 곳곳에 남아있으며 구시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세비야의 구시가지 사진세비야의 구시가지 사진
세비야의 구시가지

 

2. 세비야의 역사

고대 페니키아 바에티스(과달키비르) 강 하류에 사람들이 세운 식민 도시였는데 당시 이름은 '스팔'로 페니키아어로 저지대를 뜻하며 이 스팔이 고대 로마의 산하에서 라틴어로 히스팔리스(Hispalis)가 되고 이슬람 제국의 정복 이후에는 히스팔리스가 다시 아랍어로 이쉬빌리야(أشبيليّة/ishbiliyah)가 되었습니다. 

 

 5세기 간의 이슬람 지배기 동안 이쉬빌리야는 안달루스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고, 특히 11세기 코르도바가 쇠퇴한 후로는 세비야 타이파국의 수도에 이어 무라비트 왕조 및 무와히드 왕조의 안달루스 총독부가 되는 등 번영하였습니다. 13세기 카스티야 왕국이 이쉬빌리야를 차지하면서 에스파냐어로 세비야라고 불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콜럼버스의  항해가 시작된 곳으로 유명하고 콜럼버스의 묘도 이곳에 있습니다. 과거에는 배들도 작았고 세비야를 가로지르는 과달키비르강이 수심이 깊고 유량도 많아 항구로서 기능해서 스페인 제국의 대표적인 무역 도시이자 신대륙 교역의 첫 관문으로서 영화를 누렸지만 수위가 낮아지고 배는 커진 지금은 내륙 도시에 가까워졌습니다.

과달키비르강 사진콜럼버스의 무덤 사진
과달키비르강과 콜럼버스의 무덤

지금은 대서양과의 거리가 60km나 되는데 이렇게 세비야의 무역항 기능이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사라지면서 대신 카디스와 말라가 같은 바다에 면한 도시들이 새로운 항구로 부상했는데 과거 번성하는 항구였으나 영산강의 퇴적으로 쇠퇴했던 나주시와 비슷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에서 올림픽이 열렸을 때 세비야 엑스포가 열렸고 박람회장 출입을 위한 바르케타 다리가 가설되었으며 1999년 이곳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 마라톤에서 북한의 정성옥이 남북한 통틀어 세계육상선수권 첫 메달을 금메달로 장식한 곳이기도 합니다.

3. 특징

세비야와 그 주변의 가로수는 오렌지나무로 나름 도시의 상징처럼 여겨질 정도로 유명한데 오렌지가 익어갈 때쯤이면 거리 곳곳에서 나무에 달린 노란 오렌지로 미관도 좋아집니다. 따먹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지만 식용으로 생산되는 것에 비해 품질이 떨어지고 더럽기 때문에 현지인들은 절대 건드리지 않으며, 땅바닥에 떨어져 있으면 은행 취급을 하는데 떨어진 건 마차를 끄는 말이 먹어주니 걱정은 한해도 됩니다.

스페인의 명물인 플라멩코와 투우하면 떠오르게 되는 도시기도 하고 레콘키스타 이후 이슬람 모스크를 개조해 만든 세비야 대성당, 그리고 과거 이슬람 왕조 시절의 정원 문화를 맛볼 수 있는 알카사르 궁전, 김태희가 플라멩코를 춘 스페인 광장 등이 유명합니다.

플라맹고 사진투우장 사진
플라멩고와 투우장

그 외에 성지 주일~부활 주일 사이의 기간인 세마나 산타 기간이 되면 스페인 각지에서 열리는 행렬 의식이 매우 유명하여 해당 기간이 되면 온 유럽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들, 행렬에 따른 교통 통제, 궂은 날씨까지 겹쳐지면서 온 도시가 혼잡해지곤 합니다.


세마나 산타에 비하면 덜 유명하지만 페리아라고 하는 먹고 마시고 춤추고 축제가 세마나 산타 기간 1주~2주 후에 열리는데 이 페리아 기간에 부르는 노래와 추는 춤은 세비야나스라고 하는 세비야 지역의 전통 음악 장르입니다. 카세타(Caseta)라고 불리는 노상 클럽 같은 곳들이 페리아 기간에 1000여 개 운영하는데 이 중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카세타 푸블리가(Caseta pública)는 10개가 채 되지 않으며 나머지는 다 카세타 프리바다(Caseta privada, 사설 카세타)인데 입장 티켓을 구매하려면 그 까쎄따를 운영하는 단체에 가입해서 티켓 비용으로 20유로~80유로 정도 지불해야 합니다. 

 

 

황금의 탑 / 알카사르 궁전

1. 황금의 탑

토레 델 오로, 즉 황금의 탑은 13세기 이곳을 지배하던 무어인들에 의해 알모 아데 왕조 때에 세워졌으며, 세비야를 둘러싸고 있는 도시 성벽의 일부로 열두 면으로 된 이 감시탑의 목적은 이 땅을 되찾아 자신들의 종교로 되돌리고자 했던, 무어인의 적인 기독교 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요새 구실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황금의 탑 사진
황금의 탑

이 탑은 과달키비르 강변 한쪽에 있는 항구에 위치하고 있는데 강의 다른 편에도 비슷한 탑(은의 탑)이 세워졌으며, 두 개의 탑 사이에 쇠사슬을 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배들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아 적의 침입으로부터 이 항구 도시를 지켰습니다.

 

맞은편에 있던 탑은 지금은 없으며 16세기가 되자 토레 델 오로는 사용되지 않고 방치되어 그 일부분이 파손되었고 1755년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는 더 큰 피해를 입어 엉망이 되었는데, 이 지진은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으며 스페인에도 큰 영향을 끼쳤던 것입니다.

1760년대에 들어 탑은 수리되었고 증축되었으며 탑 꼭대기에 빙 둘러 흉벽이 조성되어 전보다 한 채의 성과 같은 외관을 갖추게 된 것도 이 시기의 일입니다. 18세기와 19세기 두 차례에 걸쳐, 이 탑은 개발업자들에 의해 헐릴 위기에 처했으나, 두 번 다 여론의 반대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무사히 살아남았습니다.

황금의 탑 사진황금의 탑 사진
황금의 탑

토레 델 오로는 연한 색의 벽돌과 돌로 축조되었으며, 왜 '황금의 탑'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어떤 이들은 이 탑이 처음 지어졌을 때는 금박으로 덮여 있어 햇빛을 받으면 금빛으로 빛났기 때문이라고 하며 다른 이들은 이보다 후에 스페인 함선들이 신세계에서 황금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이 탑을 황금 저장소로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무어인들이 통치하던 시대 이후부터 토레 델 오로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어 왔는데 감옥, 예배당, 화약 저장고, 그리고 항구의 관리 사무소가 들어섰던 적도 있으며 세계일주를 떠난 마젤란의 출발지도 바로 이곳이며 그런 인연으로 오늘날 이 탑에는 작은 해양 박물관이 있습니다.

 
 

2. 알카사르 궁전

알카사르(스페인어Alcázar, 카탈루냐어Alcàsser, 포르투갈어Alcácer 알카세르)는 8세기에서 15세기 사이 이슬람 통치 시기 이베리아반도(알안달루스)에 지어진 이슬람 양식의 성과 궁전인데 이 건축물들은 우마이야칼리파국 그리고 후대에는 스페인의 레콩키스타 이후 기독교도 통치자들에게 거처이자 지방 거점 기능을 하였습니다.

알카사르 궁전 사진
알카사르 궁전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은 오랫동안 아프리카와 유럽을 잇는 관문 역할을 해 왔는데 8세기에 스페인을 침입한 이후, 무어 족은 300년이 넘도록 이 지역에서 주도권을 유지해 왔으며 13세기에 기독교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의 '재탈환'을 개시했지만(세비야를 되찾은 것은 1248년이었다), 이슬람 세력의 오랜 지배는 안달루시아의 역사와 문화에 지워 버릴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세비야의 알카사르('궁전'을 뜻하는 아랍어 단어에서 온 이름)는 기독교와 이슬람 양식의 이러한 퓨전을 보여 주는 완벽한 예입니다.

성모님 상 사진세수 및 세족을 하는 물 사진
성모님 상과 세족하는 물

무어인들은 712년 이곳에 요새를 지었고 9세기에는 요새를 궁전으로 개조했으며 당시 궁전의 흔적이 약간 남아있기는 하나, 오늘날 볼 수 있는 건물은 대부분 1364년 '무자비한 페드로왕'이 새로운 왕궁을 지으라고 명했을 때 지어졌습니다.

 

왕궁을 지은 이들은 무데하르 장인들, 즉 기독교 세력이 스페인을 되찾은 이후에도 남아 있던 무어인들이었으며 당연히 이 건물은 기독교 군주를 위해 지어졌음에도 건축 양식에서 아랍 풍이 강력하게 느껴지는데, 말발굽 모양의 아치들, 화려한 색의 윤기 나는 타일들, 분수가 있고 지면보다 낮게 조성된 정원이 있는 안뜰 등이 특히 그렇습니다.

화려한 타일 사진정원 사진
타일과 정원

이후의 스페인 통치자들도 알카사르에 자신들이 머무르고 간 흔적을 남겼는데 이사벨라 1세 여왕은 알카사르의 '살라 델 알미란테'(제독의 홀) 안에 '카사 데 라 콘트라탁시온'(무역청)을 세웠으며 이는 신세계를 향한 스페인의 탐험을 주관하는 왕실 기관이었습니다.

정원 사진정원 사진
정원

식민지 탐험가이자 항해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이곳에서 여왕을 만났으며, 예배당에 걸려 있는 성모 마리아 그림 속에는 그의 초상화도 들어가 있고 카를로스 5세도 이슬람 디자인과 대비되게 많은 부분을 증축했습니다. 그는 1525년 알카사르에서 결혼했으며, 그 이후 사치스러운 르네상스 양식의 아파트먼트를 여러 개 지었습니다.

외부 모습 사진안쪽에 있는 수로 사진
외부 모습과 내부의 물길

 

 

여행 후기

 

열정의 나라 스페인 중에서도 플라멩코로 이름난 도시인 세비야는 그야말로 낭만과 열정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의 퓨전을 볼 수 있는 도시이기도 한데요. 특히 세비야의 알카사르 궁전은 그러한 예를 잘 보여주고 있답니다.

 

세비야의 열정의 춤 플라멩코는 낮에는 길거리 공연으로도 볼 수 있으며 밤에는 공연장에서 관람을 할 수 있는데 나름대로의 특성이 있어 두 가지를 비교해 보는 것도 묘미가 있습니다. 이 지역을 여행하시면 꼭 플라맹고춤을 관람하실 곳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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