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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 여행] 남한산성 4성문 유네스코문화유산 남한산성도립공원

플랙스라이프 발행일 : 2023-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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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경기도에서 도립공원으로 관리하고 있는데요. 남한산성의 일반사항과 남한산성의 4 성문에 대하여 소개하여 드리겠습니다.

 

 

남한산성 소개

1. 남한산성 개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옛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남한산의 산성으로 광주시에 거의 전부가 있지만, 성남시와 하남시에도 영역을 뻗으므로 3개의 지자체에 걸친 성곽입니다. 성남 쪽에서 들어가는 게 접근성이 좋기에 남한산성의 극히 일부만 걸친 성남시에서도 남한산성을 많이 홍보하고 있으며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어 경기도에서 도립공원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서문에서 바라본 시내 사진
서문전망대에서 바라본 시내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남한산성은 조선 인조 때 손을 보았는데 해발 497m인 청량산(淸凉山)을 서쪽 끝으로 해발 514m 벌 봉을 동쪽 끝으로 하여 긴 장방형 돌로 쌓았습니다. 서쪽은 경사가 가파르고 높아서 험난하며 다른 쪽은 능선이 긴 반면 성안은 낮고 평평한 분지 형상으로 북한산성과 함께 한양을 지키는 2대 산성이었습니다.

남한산성 계곡 사진
남한산성 계곡

2. 남한산성의 역사

남한산성의 세운 시기와 주체에 대해선 2가지 주장이 엇갈리는데 백제가 한성을 수도로 삼던 때 세웠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신라가가 쌓았다고 하는 주장성(晝長城)이라는 의견입니다.

남한산성 성곽 사진
남한산성 성곽 둘레길

 

백제 때 쌓은 성이란 주장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꾸준히 나왔으며 한강 유역에 도읍을 정한 백제는 내 · 외 여건 때문에 하북위례성-하남위례성-한산-한성 등 여러 차례 천도를 단행하였는데 남한산성이 전략상 요충지이기 때문에 조선 시대 사람들은 백제 왕도 중 하나이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餘地勝覽)》 · 《대동야승(大東野乘)》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등 대부분 조선 시대 책들은 백제 고성이라고 적었습니다. 다만 발굴조사 결과 신라 계통 유물은 나왔지만 백제 계통 유물이 마땅히 발견되지 않는 것은 약점인데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으니 백제의 물건을 치웠을 수 도 있는 것입니다.

주장성이란 주장은 《삼국사기》에 근거한 것으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직후 당나라와 맞붙은 나당전쟁이 한창 벌어지던 문무왕 12년(672), 만에 하나 당나라 군대를 임진강 선에서 막지 못할 경우, 바로 다음 방어선으로 활용하고자 남한산 주위에 둘레 4,360보 규모로 성을 쌓았는데, 그 이름이 주장성(晝長城)이었습니다. 남한산성이 신라 주장성이라는 설 역시 《세종실록지리지》 등 옛 자료에서 언급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최근 수행된 남한산성 행궁지 기단과 그 주변 지역 발굴조사 결과 신라계 유물이 출토됨으로써 남한산성은 신라 주장성일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그 후 임진왜란 중인 선조 28년(1595) 남한산성 자리에 다시 성을 쌓았고, 광해군 13(1621)에 개수했으며 인조 2년(1624)에는 인조가 총융사 이서에게 명하여 다시 개축했습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강화를 맺고는 재침에 대비하여 개조되었는데 개조 완료 후 광주목 읍치(邑治)가 성내로 이전되었으며 다시 광주부로 승격되었으며 이는 기본인 수도 방어 목적 외에도 행정 중심지이자 유사시 임시수도로서 기능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고 조선 시대에는 광주성이라고도 불리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피비린내 나는 처형장이 되어버렸는데 특히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장소로 신해 박해 때부터 천주교인들이 갇히기 시작했고 신유박해의 한 덕운을 시작으로 1839년 기해박해에는 김덕심, 김성우 형제 등이 순교했으며 제일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건 1866년 병인박해 때입니다. 정은, 그의 종손 정양묵, 그리고 기해박해에 순교한 김성우의 모든 가족이 체포당해 순교했으며 현재 알 수 있는 마지막 순교자는 이치재입니다.

이후에도 군사상 요충지로 광주군청이 안에 있었으나, 항일의병으로 산성과 행궁 내 군기고와 수호사찰을 불태우고 방화하여 대부분 건축물이 사라졌고 1917년에 군청 경안면으로 이전한 뒤로는 서서히 쇠락했고 방화로 터만 남아 있던 남한산성 행궁도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산성 일부와 함께 완전히 매몰됨에 따라 소실되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완벽하게 매몰되어 유구 상태가 굉장히 훌륭하여 이를 토대로 1975년부터 성벽을 복원하기 시작했고 행궁 복원은 2002년부터 시작되어 2014년 마무리되었습니다.

3. 교통 및 이용방법

지하철은 성남시 소재의 역인 산성역이 가까운데 여기서 9번, 9-1번(주말), 52번, 53번(주말)을 타고 올라가면 되며 남한산성입구역에서 하차할 경우 2번 출구로 나와 시내버스 정류소에서 382번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버스를 이용하여 남한산성 유원지 입구에서 내리면 됩니다. 단 순수하게 전철역에서 내려서 걷는다고 가정하면 산성역을 추천하지만 평일에는 남한산성입구역에서 내려서 버스를 이용하여 유원지를 통해 올라가는 것을 추천하며 휴일에는 산성역에서 내려서 9-1번, 53번을 이용하길 추천합니다.

 

주소: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산1

높이: 536m(검단산)

이용: 무료(행궁이용은 성인기준 2,000원)

지도:



등산로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마천동, 경기도 하남시 광주향교(교산신도시 예정지)에서 북문 쪽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으며 광주시(광주역)에서 이동할 경우 15-1번을 이용 이용하면 됩니다.

 

산성의 중앙에 유료주차장이 있어 주차 후 어떤 방향으로 올라가도 산성을 둘러볼 수 있는데 힘들면 성벽에서 중항방향으로 가면 주차장이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등산뿐 아니라 로드 자전거 업힐 코스로도 유명하여 주말이면 인파와 자전거가 마찰을 일으키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중앙주차장 사진
중앙주차장

 

2007년 1월 1일부로 남한산성의 입장요금은 폐지되었으며 행궁은 어른 2,000원(경기도민 무료)이고 주차요금은 평일 3천 원, 주말 5,000원입니다. 운영시간은 17:00까지입니다. 남한산성 가는 길은 왕복 2차로로 주말에는 입구에서부터 차량이 많이 밀리므로 오전시간에 출발하는 것이 좋습니다.

 

 

남한산성의 4 성문

1. 동문(좌익문)

산성의 남동쪽에 있는 문으로 좌익 문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왕이 행궁터를 중심으로 남쪽을 보고 나라를 다스리기 때문에 동쪽이 왼쪽이 되어 그렇다고 하는데 남문과 함께 사용빈도가 가장 높은 문입니다. 동문은 일반 벽돌에 비교해 덜 가공된 약 2배 정도 크기의 것을 사용하여 쌓았으며 다른 문에 비해 낮은 지대에 축조했기 때문에 성문을 지나는 길에 계단을 만들었고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여 물자의 수송은 수구 문 남쪽에 있는 11 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동문 사진
남한산성 동문(좌익문)

2. 서문(우익문)

산성 동쪽 모서리 부분의 450m 지점에 있는데 동문이 좌익 문이므로 서문은 우익 문이라고 부르며 경사가 급하여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려웠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습니다. 병자호란 때 성문을 넘으려는 청군과 전투가 있었던 곳이고 인조가 소현세자와 함께 서문을 통해 청나라 진영으로 가서 화의를 맺고 항복을 하기도 했습니다.

남한산성 서문 사진
남한산성 서문(우익문)


서문 인근에 전망대가 있는데, 위례신도시와 롯데월드타워, 한강, 그리고 남산 서울타워를 모두 조망할 수 있으며 특히 롯데월드타워와 한강, N서울타워와 남한산성 서문이 일렬로 정렬되어 있어 옥수동 달맞이 공원, 응봉산 팔각정과 함께 서울의 야경 포인트로 유명한 곳입니다.

우익문 사진
우익문

3. 남문(지화문)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m 지점에 있는 남문은 왕이 다니는 문에 걸맞게 4 대문 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며 인조도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으로 들어올 때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지금의 문루는 1976년 초석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새로 보충하여 복원하고 현판을 단 것으로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동문과 비해 비교적 그 규모가 크며 장초석을 사용하여 기둥 높이는 낮지만, 건물의 전체 높이는 약간 더 높습니다.

남한산성 남문 사진
남한산성 남문(지화문)


1990년대까지만 해도 남문으로 차량이 통행하였는데 너비가 좁아 일방통행만 가능하였으며, 반대편으로 진행하는 차량은 대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남한산성 아래를 가로지르는 산성터널이 개통된 이후로는 남문으로 사람만 통행하고 있습니다.

남한산성 남문 사진
남한산성 남문(지화문)

4. 북문(전승문)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지점에 있는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상사 창리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 시대에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으로 이 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운반했습니다. 전승문이라는 명칭은 1779년(정조 3)에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고 지어진 이름으로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인데 현재 편액은 걸려있지 않습니다. 무지개 모양의 홍예 식 문이며 홍예기 석 위에 홍예 돌 10개를 쌓아 구축하였습니다.

남한산성 북문 사진
남한산성 북문(전승문)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전할 때 인조와 김류의 독촉으로 이시백이 조선군 300명을 이끌고 남한산성 북문으로 나와 싸우려고 대기하고 있었지만 청나라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군사 300명이 모두 전멸한 일을 기려 패하지 말고 모두 이기자 해서 북문의 이름이 전승문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2021년 4월 21일부터 해체보수공사가 이루어져 북문(전승문)에서의 출입이 불가능하니 북쪽(교산신도시북쪽(교산신도시 쪽)에서 남한산성으로 올라오는 고골계곡 등산로를 이용하기 전에 알아두는 것이 좋습니다.

 

방문 후기

 

남한산성은 서울 근교에 있어 수도권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도립공원으로 역사적인 발자취를 둘러보고 서울과 성남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에서의 풍광은 바라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장소입니다.

 

4 성문을 포함하여 남한산성의 성곽, 행궁, 수어장대 등 역사적인 문화유적을 찾아보는 것도 운동을 겸한 좋은 등산코스로 생각되어 방문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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